1980년대 전후부터 순직군인 유족회 출범 노력 무산
작성자 최고관리자


1980년대 전후부터  순직군인 유족회 출범 노력 무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부터 1953년7월27일 휴전까지 전사군인 그리고 부상군인들은 

1.대한민국 전몰군경유족회. 

2.대한민국 전몰군경미망인회 

3.대한민국 상이군경회 


라는 이름으로 공법단체가 있었지만 한국전쟁 이후부터 2022년에 이르기까지 순직한

군인은 70여년간 유족회가 설립되지 못하였다

월남전을 포함해서 한국전쟁과는 그 성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하게 앞에 열거한 

3개 단체속에 순직군인과 부상군인을 함께 취급하고 있었다.


 

징병제 의무복무자로서 사망한 군인과 부상당한 군인이 한때는 개죽음이라는 핀찬을

들으면서 우리의 순직한 장병들이 일반사망으로 처리되여 국가유공자의 예우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0년 전후부터 인권존중과 경제성장으로 국가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2000년 김대중 정부를 전후해서 한국전쟁 이후 사망한 아버지가 늦게서야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어 아들 딸에게 주어진 *국가유공자증*을 받을 당시에는 40대가 훌쩍 넘어간 

중년의 아들.딸이 되었고 아버지는 순직하고 어머니는 재가하고 유가족인 어린 자녀들은

가난속에서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할 정도의 세월을 보내왔다. 

한마디로 배움이 기회를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국가보훈 정책이 잘 되었더라면 당당하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순직한

아버지를 기억하면서 미성년자를 벗어난 20세까지 이웃의 존경을 받고 

성장했으리라 생각한다. 마치 일제강점기의 독립유공자 예우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상이군경회는 오래전 출범해서 공법단체로서 보훈사업에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그러나 순직군인으로서 현충원에 안장 된 가슴 아픈 유가족은 늦게서야 유족회의 출범을 노력했지만 

내적요인 외적요인 등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내적요인은 유족들간의 불신으로 국가보훈부에 아에 접수조차 못하였고

외적요인은 국가보훈부는 유족회 발족을 위하여 노력을 안했던 것이다.


즉 결론이 *순직군인 유족회*의 부재로 인하여 많은 순직한 장병들이 일반사망으로

취급되어 어머니도 죽는 날까지 아들을 가슴에 묻고 지금도 어느 산하에 묻혀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슬픈 대한민국의 보훈정책의 역사인 것이다.


이제 한국전쟁 당시에 유골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반사망으로 취급된 아까운 목숨이

유족회의 발족으로 반드시 국방부와 보훈부가 국가유공자를 찾아내서 늦었지만

그 예우를 다하는 것이 국가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작성자=>대한민국 순직 국군장병 유족회장 박형방

작성일=>2022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