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1일 *의병의 날*을 아시나요? [2011년 6월 1일 제1회 추념식]
작성자 최고관리자

매년 6월1일  *의병의 날*을 아시나요?  


의병의 날은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주관으로 의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의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행사를 개최하는 대한민국의 기념일로, 

매년 6월 1일이다. 2010년 5월에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었고. 2011년부터 기념하고 있다.


제정 연혁

  • 1982년 10월 19일 안호상 의병기념사업회장과 박순천 씨등은 4월 22
  • '의병의 날'로 정해 달라고 국회 등에 청원했다. 
  • 이들은 독립기념관 건립 추진과 때맞춰 외세항쟁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 '의병의 날' 제정이 필요하다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홍의장군 곽재우가 
  • 경남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의병의 효시가 됐던 4월 22일을 '의병의 날'로 정하자고 건의했다.
  • 2008년 8월 의령군수 등 1만 5586명이 '호국의병의 날' 기념일 제정을 국회에 청원, 
  • 2010년 2월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었다. 
  • 임진왜란 시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1592년 음력 4월 22일을 
  • 양력으로 환산해,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인 6월 1일로 선정하였다.
  • 2010년 5월 25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령'이 
  • 대한민국 관보에 게재, 공포되었다.

제정 이유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병(義兵)의 정의
의병(義兵)은 주로 한국사에서 정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민병을 뜻하는 말이다. 
창의군(昌義軍)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대몽항쟁에서 유명한 김윤후가 살리타를 무찌를 때 그의 신분은 승려였고 
그가 이끈 군대는 노비가 주축이 된 민병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이전의 민병들을 의병이라 일컫지는 않는다.

조선시대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외적의 침략에 맞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민간 무장 조직을 의병이라 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 역시 이러한 흐름과 상통하는 것으로 이들은 변변한 무기도 갖추지 못하였으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

의병(義兵)의 조직
의병은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그들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은 전직 관료와 사림 그리고 승려들이었다. 
의병의 신분 구성이 다양하듯이 사상적 기반도 다양하였지만, 유교의 충의정신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유교를 발전시킨 것이 국방을 소홀히 한 점도 있지만, 
그 대신 국민들의 충성심을 배양하여 그 저력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또한, 한국은 예로부터 향촌 공동체가 향토 방위를 떠맡아 온 오랜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의병 부대의 조직은 매우 수월하였다

의병들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고, 향토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적대하기 위해서 정면 충돌보다는 
매복·기습·위장 등과 같은 유격 전술을 많이 써서 적에게 큰 괴로움을 주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전국 의병할동
중에서도 많은 전과를 거두고 명성을 떨친 사람은 평안도 조호익(曺好益)·양덕록(楊德祿)·서산대사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 경기도의 김천일(金天鎰)·심대(沈岱)·홍계남(洪季男),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고령의 김면(金沔),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영천의 권응수(權應銖), 충청도의 조헌(趙憲),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 김덕령(金德齡), 황해도의 이정암(李廷馣), 강원도의 사명당 등이다.

1592년 4월 14일 약 20만 명의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부산에서는 첨사 정발(鄭撥)이, 
동래성에서는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충주 탄금대에서는 신립(申砬) 장군이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막아내지 못하였다. 왜군이 서울 근교에 육박하자 선조는 4월 29일 세자와 함께 의주로 피난하고, 
임해군과 순화군 등 두 왕자를 함경도와 강원도로 보내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였다.

대한제국(大韓帝國) 전후 의병활동
대한제국 시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은 1895년의 을미의병과 
1905년 이후의 을사의병·정미의병이 대표적이다.
1895년 의병은 흔히 을미의병이라 하며 지방의 명망있는 유생을 중심으로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이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고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를 을사의병이라 한다. 이 시기 의병 역시 초기에는 최익현 등 지방의 명망있는 유생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투쟁 대열에서 곧 탈락되었다. 
최익현은 관군이 진압하자 국왕에게 칼을 겨눌 수 없다는 봉건 윤리에 의해 스스로 투항하였고, 
이 대신에 무명의 유생과 농민이 의병의 주축이 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후 상당수의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였다
이 시기의 유명한 의병 활동가로는 홍범도김상한신돌석안중근 등이 있다.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백암(白岩) 박은식(朴殷植) 선생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다.”라고 하면서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제1회 의병의 날 기념식
2011년 6월1일 의령군에서는 제1회 의병의 날 기념식은 오전 11시 중앙과 전국의 주요인사와 의병 관련 단체, 
의병장 후손, 군민 등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공설운동장에서 개최했다
기념일은 임진왜란 때 망우당 곽재우 홍의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으로 의령군의 숙원사업이었다.
2010년 5월25일 법정기념일로 제정됐다


작성자: 대한민국 순직군인 유족회장 박형방
작성일:2024년7월14일